“돌아가고 싶어?”
망설임도 없이 그는 대답했다. “당연히 돌아가고 싶지. 고향 생각 매일 하는 거 같아.” 그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가 말하는 그의 고향은 빈곤하고, 인권이 박탈 된 전체주의 체제 사회인 북한이기 때문이다. 내가 볼티모어에서 성철 오빠와 처음 만난 건 2014년 이었다. 내가 디렉팅하고 있던 탈북민들의 스토리를 다룬 영상프로젝트를 위해 오빠를 만나 인터뷰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전공과 상관없이 특별한 계기로 북한 인권 단체에서 근무했고 그 후에는 인도주의 의료 선교 단체에서 일했다. 그런 내가 아는 북한은 결코 누구도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철오빠가 다시 그곳에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곳은 오빠를 너무 아프게 한 곳이었다. 1990년대에 적어도 2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근에서 살아남은 오빠는 탈북 과정에 네 번이나 잡혀서 징역과 고문을 당했다. 보위부에서 사랑하는 어머니가 탈북했다는 이유로 사람 취급도 못받으며 기어다녀야만 했던 광경도 봐야했던 오빠였다. 그런 오빠의 이야기를 알기에 더욱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북한... 너무 밉지만 그리운 고향이야” 오빠가 말했다. “버리고 싶지만 품고도 싶은 곳이야.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자신의 고향에 대해 떠올리던 오빠의 얼굴을 아직도 난 잊지 못한다. 봄에는 살구꽃,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개하여 그의 동네 산을 풍경화처럼 덮어 버리곤 했다고 말했다. “내가 그림만 잘 그렸다면 너한테 그려서 보여줄텐데” 라며 말로는 감히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우리가 서있던 볼티모어 길거리에서 집게 손가락으로 공중에 가상의 지도를 그리며 고향을 설명해줬다. 친구들과 종이로 만든 총과 나무칼을 휘두르며 뛰놀던 얘기를 할 때는 마치 소년 같았다.
그에게 김정일 정권의 모든 잔학 행위에도 불구하고 고향은 여전히 그가 자란 작은 북한 마을, 이웃과 나눠 먹던 음식, 그리고 친구들과의 추억이었다.
그 곳은 내가 알던 북한과 전혀 달랐다. 언론은 전세계의 인식 속에 과체중 독재자들의 망상 왕조에 의해 운영되는 디스토피아적인 국가로서의 북한의 이미지를 새겨 놓았다. 선의의 비영리 단체들 또한 인도적 상황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장려하기 위해 굶주려 광대가 튀어나온 북한 어린이들과 맨발로 시커먼 길가에서 방황하는 고아들의 사진을 각인시켰다. 집으로서의, 고향으로서의 북한은 거의 보여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탈북민인 오빠는 북한 체제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다신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 정착한 이후 북한의 인권 침해에 대해 너무 많이 언급했다. 그에게 고향방문과 가장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일은 한국에 재정착한 다른 탈북민 친구들과 만나 인조고기 같은 고향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다.
성철오빠를 만난 그 날 밤 오빠와 나눴던 대화에 대해 깊게 생각해봤다. 나는 나의 고향, 나의 집은 어딜까 궁금해졌다. 한국에서 우리 가족이 살았던 고층 아파트일까? 아니면 처음 미국에 이민 와서 살았던 듀플렉스일까? 나의 사람들은 누구일까? 한국의 어린 시절 친구들일까 아니면 미국에서 만난 한국계 미국인들일까? 나에게 고향이란 너무 많은 것 같으면서도 또 하나도 없는것 같기도 했다.
부모님과 나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이민 왔지만 떠난 날부터 한국으로 돌아갈 꿈을 꾸었다. 이민 와서 처음 들어간 미국학교에선 영어를 못한다고 놀림당했다. 전교에 세 명뿐인 동아시아인 중 한 명이었던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반에서 제일 웃긴 아이로 뽑히곤 했던 나는 미국에 오니 조용한 외국인이 되어있었다. 물론 내가 조용했던 건 부끄럼이 많고 얌전해서가 아니라 내 영어 발음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난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하루 종일 참았던 한국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마다 랩을 하듯 예술의 전당이나 엄마와 자주 갔었던 소극장들 그리고 한국에 가면 먹고 싶은 음식들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할머니의 간장게장과 엑설런트 아이스크림 그리고 즐겨먹었던 ABC초콜렛 등 미국에선 찾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잊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게 항상 생각하며, 한국에 가게 되면 먹고 싶은 것들을 리스트로 만들고, 돌아가면 보게 될 친척들과 친구들을 볼 꿈을 꿨다.
17년이 지나서야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나의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설렘을 가득 안고 도착한 서울은 내가 기억하는 서울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더이상 미국에서처럼 한국말을 할 때 조용히 말하지 않아도 되고 카페에서도 실컷 떠들 수 있어서 편했고, 뜬금없이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자기는 불고기를 먹어봤고 방탄소년단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이 없어 좋았다. 내가 그토록 마시고 싶었지만 한인 마켓에는 팔지 않아 날 너무 슬프게 했던 삼각커피우유의 맛은 내가 기억하는 맛과 너무 달랐다. 내가 조국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던 미국에 있는 친구들은 얼마나 재밌고 좋냐며 문자를 보냈다. 나는 “뭐가 이상해. 많이 달라졌어 여기. 내가 있을 곳이란 생각이 안들어” 라고 얘기했다. 17년동안 나의 집, 내가 있을 곳은 한국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막상 와보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집을 또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다. 지난 17년동안 한 순간도 나의 집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미국이 그립기까지 했다. 치폴레, 공중화장실에 있는 변기커버, 엄마의 김치찌개, 그리고 매운맛 치토스가 그리웠다.
너무 답답했다. 나는 한국이 나의 고향이어야 했고 내 고향처럼 느껴지길 바랬다. 배치 후 집에 돌아오는 군인같은 경험을 기대했다. 영광스러운 귀환을 꿈꾸던 나의 기대는 더 이상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쓰라린 현실과 부딪혔다. 미국에서 나와 같은 이민자들이 겪는 “영원한 외국인”이라는 상표가 마치 나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것처럼 나는 이제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2018년 연구 차 방문하게 된 한국에서의 마지막날 난 성철오빠와 다른 탈북민 친구와 저녁식사를 했다. 성철오빠는 맛있는 양꼬치를 먹자며 차이나타운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모두가 중국어를 썼기 때문에 내 자신이 다른 방식으로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앞에 있는 양꼬치와 칭다오맥주를 보며 오빠는 중국에서 무신분 노동자로 일할 때 처음 그것들을 먹어봤다고 했다. 앞에 있는 그릴의 열기 때문인지 맥주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로 몇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저녁식사 후 차이나타운을 빠져나가는데 성철오빠가 길가 노점상에서 파는 중국 빵을 가지고 가라며 말했다. “난 집 생각나면 여기와서 이거 먹어.”
어떻게 북한빵도 아니고 중국빵이 집을 떠올리게 하는건지 혼란스러웠던 내가 배불러서 더이상은 못 먹겠다고 했더니 나중에 배고플 수 있으니까 갖고 가라며 굳이 빵이 담긴 검은 봉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성철오빠와의 첫 만남 이후 나는 다섯번이나 이사를 했는데 이사할때마다 오빠와의 추억을 되새기게 된다. 한국에서의 마지막날 밤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뭐 그렇게 생각만큼 복잡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성철오빠에게 집이란 지리 또는 국적, 소속 여부에 따라 제한되지 않는 것 같다. 오빠는 자신이 집이라고 불렀던 그 모든 곳에서 쫓겨날 때마다 다시 돌아올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항상 나가는 길에 집의 일부를 가지고 나온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가 배가 부른데도 나중에 먹으려고 빵을 가져가는 거랑 같은 건가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할 때 필요할 수 있으니까. 우리의 개인적 기억들은 우리가 어디에 있건 간에 그곳을 우리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우리의 집, 고향이라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 같다.
Rachel J. Lee는 보스턴대학의 반인종차별주의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탈북민 정착과 인권 문제 관련 일을 한 이력이 있으며, 북한이 개방되면 북한에서 친구들의 가족을 만나 함께 식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한국어 번역 - Rachel J. Lee 번역 도움 - Dami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