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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스키의 역사: 대나무 스키에서 올림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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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스키의 현재와 과거가 강원도에 모였다. 올해 개최된 평창 동계올림픽은 한반도의 남과 북에 살고 있는 국민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을 한 곳에 모으는 화합의 장이 되었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 국내에서 다양한 동계스포츠 종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종목인 스키가 어떻게 한반도에 도입되고 발전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 스키인의 여정을 통해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기 이전, 북에서부터 남으로 이어져온 한국 스키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1940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열린 <전조선 스키선수권대회>에서 조선인인 최훈 선수가 18km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36km 계주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최 선수는 일본인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조선인 최초의 전조선 스키선수권 대회에 입상자임을 알게 되면서 더욱 흥분하였다. 대회에서 메달을 딴 기쁨도 컸지만, 최초의 조선인 입상자가 된 것에 더 큰 자부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름은 <전조선 스키선수권대회>였지만, 대략 180-190명의 참가자 중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정작 조선인 참가자는 2-3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메달은 더욱 값진 것이었다. 

    최훈 선수는 바로 2년 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나의 외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한국 스키의 역사 편찬을 위해 1990년대부터 조사를 시작하셨고, 자신이 남과 북의 스키계에서 활약한 내용도 자세히 기록하셨다. 원고 작성은 2000년대 후반에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치매와 건강 악화로 할아버지는 그 일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잃으셨고, 원고는 옷장 안에 방치된 채 주인을 떠나보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엄마는 옷장 안에 잠들어있던 원고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원고를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할아버지의 한국 스키역사 조사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원고에는 이번  평창 올림픽 개최의 밑거름이 되었을 한반도의 초창기 동계스포츠인, 특히 스키인의 노력이 상세하게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Choi Hoon
    30대 때의 할아버지, 최 훈.
    사진 저자 제공
    Choi Hoon
    40대 때의 최 훈.
    사진 저자 제공

    문화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남북공동입장은 할아버지가 경험한 한국 스키의 발전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느끼신 한국 스키의 정체성은 남한이나 북한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한반도에서 스키가 전파되는 과정을 남과 북에서 직접 경험한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39년 17살에 처음 선수로 데뷔한 그는 함경북도 성진의 성진철도스키구락부(클럽)에 첫 한국인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1945년 해방과 함께 구락부가 자연 소멸되면서 짧은 선수 생활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비록 1940-50년대의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선수로서 커리어는 끝났지만, 할아버지의 스키에 대한 열정은 남한으로 피난온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코치생활 16년, 대한스키협회 이사 10년, 스키소식 편집장 12년을 역임하면서 스키 발전에 전 생애를 헌신하였다.

    원고에는 한반도에 스키가 처음 도입된 경로에 대한 다양한 의견도 나와있는데, 할아버지는 이 중 일제시대 나카무라 오카죠에 의해 전해졌다는 설을 가장 신빙성 있게 보았다. 1921년 원산중학교에 일본인 체육교사 나카무라가 부임하면서 오스트리아식 스키 2대를 가져왔으며, 당시에는 조선에 현대식 스키가 없어서, 나카무라 선생이 일본 고향에 있는 동료와 친척들에게 스키 20대를 지원받아 원산중학교에 스키부를 만들었고, 이 스키부가 스키집단 시범 공개활주를 성공적으로 선보이면서, 훗날 조선 최초의 스키장인 신풍리 스키장이 건설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Ski lesson with Nakamura Okajo
    나카무라 선생님의 스키강습회 모습.
    사진 저자 제공
    Shin-poong-ri ski facility
    원산 신풍리 스키장의 모습.
    사진 저자 제공

    1929년에는 원산 신풍리 스키장에서 한반도 최초의 스키대회가 개최되었다. 할아버지는 참가자 대부분이 일본인 남성이었던 이 대회에 원산고등여학교 학생들이 참가한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자세하게 기록하셨다. 

    “10명으로 구성된 여학생들은 나카무라교사의 도움으로 원산 중학교 스키부에서 사용하는 스키를 임시로 대여하고 스키 지도를 받았다. 또한 당시 스키복은 없었으므로 부득이 교복 차림으로 스키를 탈 수밖에 없었다. 원산고여는 오늘날 한국 스키사상 최초로 여자 스키인을 이 땅에 탄생시킨 학교가 되었으며 최초의 여자스키부를 결성한 학교로 등장했다.”

    Oak tree skis
    함경남도에서 화전민들이 참나무스키로 수렵을 했다. 1933년 12월조선스키연맹 촬영.
    사진 저자 제공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조선인 여성도 대회에 참가하여 함께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스키에 대한 열정이었을 것이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간에 민족 신분의 차등으로 인한 구조적 불평등이 존재했고, 이는 스키 인구와 장비 보급에도 확연히 나타났다. 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이 조선인들의 스키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1940년에 한반도의 스키 인구는 대략 6,000명이었는데, 그 중 한국인은 300명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1930년대의 스키장은 일본인 스키어로 붐비고 있을 때 그 사이를 뚫고 한국인 어린이들이 스틱도 없이 대나무 스키로 활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며, 자신도 선수시절 이전에는 대나무 스키를 탔으며, 성진스키대회에 출전을 계기로 성진철도스키구락부의 멤버가 되면서 사토 코치에게 현대식 스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일본의 패망 후 사토 코치는 자신의 스키와 기타 장비를 소년 최훈에게 넘겨주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이와 비슷한 계기로 광복 직후 기존의 대나무 스키를 타던 한국의 스키인들은 일본 스키인들이 놓고 간 현대식 스키를 사용했을 거라 짐작된다.

    해방 이후에 조선스키협회의 첫 과제는 스키 인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북에는 이미 10곳의 스키장이 있었지만 남에는 스키장이 한 곳도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스키의 균형 발전을 위해 해방 이후 1947년 제1회 전국스키선수권대회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개최되었다. 심지어 한국 전쟁 당시에도 스키대회는 한반도 각지에서 계속해서 열렸다. 전쟁 이후에도 국내 스키 장려 활동과 국제 스키계 진출을 위한 협회와 할아버지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특히 196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쿼밸리에서 개최된 동계 올림픽에 최초로 한국인 스키선수 - 김하윤, 임경순 - 를 파견했을 당시 할아버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Choi Hoon with the Nakamura family
    할아버지(가운데 회색 양복)께서 자료수집을 위해 1994년 5월 일본에 방문하셨을때 나카무라 선생님 유가족들과 찍은 사진.
    사진 저자 제공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요양원에 입원해 계셨다. 부모님을 통해 부고를 들었을 때, 나는 그래도 평창올림픽까지만이라도 보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원고를 읽으며 할아버지의 한국 동계올림픽 개최에 대한 염원과 바램을 알고 나니 더 마음이 아팠다.

    이번 평창올림픽을 보는 동안 나는 여러 감정이 섞인 복잡한 마음이었다. 많은 선수들이 다양한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올림픽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며 영감을 받았지만, 마음 한 켠에선 자꾸 생전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 손에 리모컨을 꼭 쥐고 스키경기를 보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할아버지는 올림픽 기간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스키 및 여러 동계스포츠 경기를 빼놓지 않고 꼭 챙겨 보셨다. 그 당시에 나는 할아버지가 한국인 선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의 경기를 국적에 상관없이 응원하시는 모습을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왜 약소국 또는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 선수들에게 더 마음이 쓰였는지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젊은 시절 스키 선수 최훈도 그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원고에 일제시대 때는 신분 차등을 겪는 조선인 스키 선수로, 이후 남한에서는 ‘이북 출신’ 스키인으로 자신의 공로를 다 인정받지 못하는 에피소드를 적기도 하셨다.    

    한편, 할아버지에게 통일은 선택이 아닌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원고에는 “언제인가 남북의 통일이 되면 협회가 구성될 것인데 그때 진정한 스키의 전통의식에 뼈가 굳어진 남북 스키인들이 합친 그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라는 소망을 담았다. 할아버지가 바라던 이상적인 통일 후의 스키협회의 모습은, 초기 조선스키연맹의 창설 정신 “스포츠엔 민족 차별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며 이 땅에서 조선인 일본인을 구별할 것 없이 훌륭한 스키선수가 탄생하도록 하는 것이 연맹의 취지” 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차별이 없는 경쟁과 경쟁을 통한 건강과 화합을 꾀하는 스포츠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현정 씨는 스미스소니언 민속문화유산센터 내 랄프 린즐러 민속 아카이브의 보조 아키비스트입니다. 2018년 목표 중 하나는 외할아버지의 500페이지 원고를 출판하여 후대에 남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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